2016. 02. 14. Sunday, Genesis 38:1

2016. 02. 14. Sunday

Genesis 38:1
And it happened at that time that Judah went down, away from his brothers, and turned aside to a man of Adullam named Hirah. 


유다가 어디론가 내려가다(ירד = to descend, to go downward)가 아둘람(Adullam) 사람 히라(Hirah)에게로 방향을 돌린다.

유다는 왜, 그리고 어디로 내려간 것일까? 그리고 왜 그는 히라에게로 방향을 돌린 것일까?


요셉의 형들은 얼마전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들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꾸며 속인다.

그리고 요셉의 염소피 묻은 옷을 본 아버지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통곡하며 자녀들의 위로를 거절하고 슬픔 가운데 빠진다.

이것을 본 유다는 자기 동생 요셉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지만 요셉을 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집을 떠난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왜 유다는 자기 형제들로부터 떨어지려고 한 것일까?

그들과 함께 있으면 요셉을 팔았던 그 당시가 늘 생각나고 그것이 그를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닐까?

궁극적인 해결없이 그냥 떠나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결되지 않은 것 때문에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한 뒤 이집트로 가서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요셉을 다시 찾아 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고 너무 늦어 버린 것일까?

그래서 유다는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는 형제들과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끔찍한 죄이며, 아무리 오래된 죄라고 해도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값을 지불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행한 잘못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하고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이러한 댓가 지불 없이 말로만 잘못을 아뢰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죄에 대한 고백뿐이거나 말장난일 뿐이다. 이처럼 죄에 대한 고백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죄책감에서 자유케 해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관계를 회복시켜 줄 수는 없다.

즉 내가 누군가의 물건을 훔쳤으면 그 물건을 돌려 주든지 그에 상응하는 물건값을 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고백함으로써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있었던 정죄감에서는 자유케 될 수 있지만 깨어진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헤브론은 모이는 곳이 맞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살인죄와 요셉을 판 인신매매 죄, 그리고 거짓말을 한 허위사실 조작과 유포 죄를 갖고 헤브론에 함께 살고 있었다.


유다는 정말 아둘람을 목적지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무조건 무작정 헤브론을 떠난 것일까? 

그런데 유다가 처음부터 아둘람을 목적지로 정하고 갔다면 그것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아둘람(עדלּם = justice of the people)이라는 히브리어 뜻이 "사람들의 정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유다가 동생을 살리고자 한 것도, 헤브론을 떠나서 아둘람으로 내려간 것도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뭔가 정의(justice)를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아둘람으로 가는 길에 방향을 돌려 히라(חירה = splendor)라는 사람에게로 간다.

히라는 그 이름처럼 그 지역에서 재산도 있고 명망도 있고 꽤 알려진 유지였던 것이 아닐까?


히라는 유다의 가는 길을 방해한 사람일까? 아니면 유다의 가는 길을 돌려 멈추게 하며 도와준 사람일까?

내 인생 길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도와 주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방해하는 사람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며 어떤 사람은 나를 도와 주는 것 같지만 나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마지막 하루의 여정을 마칠 때 나타난 불병거와 불말들은 엘리야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갈 하나님의 준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엘리사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혼란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대로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2 Kings 2:1
And it happened, when Jehovah was to take up Elijah to Heaven in a tempest, Elijah and Elisha went from Gilgal. 

그러므로 불말들과 불병거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엘리사가 그의 시선을 끝까지 엘리야에게 두고 있는지, 아니면 주변 것들에 그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는지를 테스트하는 하나님의 도구였음이 분명해 진다.

2 Kings 2:11
And it happened, as they were going on and speaking, behold, a chariot of fire and horses of fire came . And they separated between them both, and Elijah went up in a tempest to Heaven. 


벧엘에서 제사를 드리던 여로보암에게 유다에서 온 한 선지자가 나타나 예언을 하고 길을 떠난다.

하나님은 그에게 왔던 길로 돌아가지 말고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곧 장 가라고 했지만 뒤늦게 나타난 늙은 선지자가 자기도 선지자라는 말에 속아 그의 집에 가서 먹고 마신다. 나와 같다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1 Kings 13:18
And he said to him, I also am a prophet like yourself, and an angel spoke to me by the word of Jehovah, saying, Bring him back with you into your house, and he shall eat bread and water (he lied to him). 
이처럼 우리는 이 젊은 선지자처럼 거짓에 넘어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마음과 시선을 거기에 빼앗기거나 거기에 두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 버릴 수 있다.

부자 청년 관원이 그랬고 사울 왕이 그랬다. 그들에게 아무 것도 없었을 때,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는 겸손하고 갈급했다.

하지만 그들의 소유가 늘어나고 그들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버린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유다가 그 형제들을 떠나 내려가는 길에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방향을 돌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내려가는 인생길에 만나는 사람도 있고 올라가는 인생길에 만나는 사람도 있다. 내려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겸손히 대할 수밖에 없지만 내가 올라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교만하게 대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여정은 보디발 집의 가정 총무가 되는 등 약간 올라가는 시간이 있긴했지만 바로 왕이 그를 부르기까지 계속해서 내려가는 절망의 여정이었다.

모세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올라가는 여정이 한동안 있었지만 나일강에 띄워진 이후 그의 삶은 내려가는 여정이었다.

예수님도 하늘을 떠나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해서 내려가는 여정이었다.

이렇게 내려가는 여정이 없이 올라가면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게 되고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 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1 Peter 5:5
Likewise, younger ones be subject to older ones; and all being subject to one another. Put on humility, because God sets Himself "against proud ones, but He gives grace to humble ones." Prov. 3:34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왕국의 영광으로 인해 교만하다가 하루 아침에 짐승처럼 떨어져 풀을 먹고 이슬에 젖는 신세가 된다.

Daniel 4:32
And you shall be driven from men, and your dwelling shall be with the animals of the field. You shall be fed with the grass like oxen,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you until you know that the Most High is Ruler in the kingdom of men, and that He gives it to whomever He desires. 


그러므로 올라가기 전에 내려가는 것을 매일 연습해야 한다. 엘리베이트가 올라가려면 다른 한쪽에서는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내려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올라가게 된다.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 내려가는 이 일은 아버지가 감정적으로 안정이 안된 상태에 있을 때, 요셉이 사라지고 그의 부재가 있을 때, 모든 가족들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일어났다.

즉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고 요셉이 함께 있었다면 유다가 내려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다(=찬양)가 내려가는 일이 일어나면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 찬양(유다)대신 원망이나 불평이 나오고 유다가 내려가는 모습이 있다면 내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팔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것의 회복은 유다가 자기 이름과 삶을 걸고, 자기 자신을 베냐민 대신 이집트 총리 요셉에게 종으로 내어 주면서 일어난다.

Genesis 43:9
I will be surety for him; you may require him from my hand. If I do not bring him to you and set him before you, I shall be a sinner against you all the days. 

내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드릴 때, 아버지 야곱의 심정을 헤아리고 이복 동생인 벤야민을 살리기 위해서 자원해서 나를 평생 종으로 요셉에게 내어줄 때 유다가 회복된다.

Genesis 44:33
And now please let your servant remain as a slave to my lord instead of the youth; and let the youth go up with his brothers. 

니처럼 진정한 찬양(유다)이란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다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그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