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04. Thursday, Genesis 37:29 (seen to unseen)

 2016. 02. 04. Thursday

Genesis 37:29
(And they brought Joseph into Egypt.) 29 And Reuben came back to the pit. And, behold, Joseph was not in the pit; and he tore his clothes.


요셉이 그 웅덩이에서 없어졌다는 것이 그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요셉이 그 우물에서 없어진 것을 곧 요셉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요셉의 찢어지고 염소피 묻은 옷을 보자마자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받아들인 것과 같다.

그런데 실상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이 아니라 형들에 의해 팔려서 노예가 되어 이집트로 간 것이다.

그러므로 없어지고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고통스럽고 괴롭고 처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면 너무 가혹한 말일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 보이는 것도 한 장의 얇은 종이만 눈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이삭은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야곱을 에서라고 결론짓고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었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이 자기 아들들을 축복해 달라고 하며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왔을 때 그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손을 엇갈리게 하면서 정확하게 그들을 인식한다.

즉 그는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영적) 감각을 사용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 차자의 축복을 한다.  

아마도 야곱은 자기가 눈먼 아버지를 속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비록 그의 육신의 눈이 멀었어도 다른 눈으로 보고 그들을 축복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 마음의 눈, 영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엡 1:18)

Ephesians 1:18
the eyes of your mind having been enlightened, for you to know what is the hope of His calling, and what the riches of the glory of His inheritance in the saints,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하라고 하신다. (막 8:18, 렘 5:21, 계 3:18)

Mark 8:18
"Having eyes, do you not see? And having ears, do you not hear?" And do you not remember?

Jeremiah 5:21
Now hear this, O foolish people, even you without heart, who have eyes and do not see, who have ears and do not hear.  

Revelation 3:18
I advise you to buy from Me gold having been fired by fire, that you may be rich; and white garments, that you may be clothed, and your shame and nakedness may not be revealed. And anoint your eyes with eye salve, that you may see.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우리는 터무니 없는 해석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전혀 엉뚱한 풀이를 하고 살아간다.

눈에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신체의 부위는 일부분이 손상이 되거나 없어져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심장이나 간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부위가 손상되거나 잘려진다면 치명상을 주고 생명을 잃게 된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자주 간과되는 영역이다. 하지만 함께 일을 하거나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음은 다른 어떤 능력이나 학력, 외모나 배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다.

눈에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고 해도 욥의 첫째 아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거나 아하수에로 왕의 아내였던 와스디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시효과로는 괜찮겠지만 아내로 함께 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욥의 아내는 남편이 그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위로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다. (욥 2:9)

Job 2:9
And his wife said to him, Are you still holding fast to your integrity? Curse God and die!  


전대미문의 미모를 자랑하던 왕후 와스디는 남편 아하수에르 왕이 대신들 앞에서 불렀지만 자존심 때문에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가 폐위되고 말았다. (에스더 1:11-12)

Esther 1:11-12
11 to bring Vashti the queen before the king with the royal crown, in order to make known to the people and the princes her beauty. For she was beautiful to look upon. 12 But Vashti the queen refused to come at the king's command by his eunuchs. And the king was very angry, and his fury burned within him.


하지만 룻 같은 여인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저버리지 않았고 자기 가정에 저주를 허락한 것 같은 하나님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섬기고 따른다.

그랬기 때문에 보아스가 그 룻의 마음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자기 논에서 이삭을 줍게 했을뿐 아니라 일부러 이삭을 흘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어느날 시어머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이삭을 줏으러 나왔다가 보아스의 눈에 룻이 발견되었고 그 마음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결국은 보아스의 아내가 된다.

룻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모압 여인이었고 과부였으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 베들레헴에서는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보아스는 다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하나님도 그녀를 전혀 다른 눈으로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를 통해 베들레헴에 다윗을 보내셨고 예수님을 보내셨다.

갈릴리 나사렛에 살았던 마리아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와 비슷하다. 그녀는 만 13~14 살 정도였고 집안은 가난했으며 이름없는 시골뜨기 소녀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녀 내면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천사를 보내셨고 그녀에게 예수님을 보내신다.

유다는 아내를 잃은 뒤 양털을 깍기 위해 아둘람으로 가는 길에 한 창녀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고 그녀는 임신을 했다. 그런데 그 창녀라고 여겼던 여자가 자기 며느리였고 아들이면서 손자인 두 남자 아이를 출산한다.

우리의 보는 눈은 우리 마음의 상태나 감정, 그리고 상대방이 어떻게 꾸몄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을 너무 신뢰하면 안된다. 그래서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히 11:1)
 
Hebrews 11:1
Now faith is the substantiation of things having been hoped, the evidence of things not having been seen.  


르우벤이 그 우물에서 요셉을 발견치 못한 것이 다행이다. 왜냐하면 요셉이 아직도 거기 있었다면 르우벤은 요셉을 빼돌리기 위해 고민해야 했을 것이고, 요셉을 빼돌려서 집으로 가게 되었다면 집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르우벤의 입장에서 보면 요셉이 웅덩이에서 사라진 이것은 그가 옷을 찢고 통곡할 만큼 처참한 상황이 터진 것이 맞지만 큰 그림 속에서는 요셉이 이집트로 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꿍꿍이 속을 갖고 딴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 내 눈에서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축복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계속해서 거기에 마음을 쓰고 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제거하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 눈에 꼴도 보기 싫은 그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다루시고 빚으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울 왕을 자기 눈 앞에서 없앨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없애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러한 사울 왕을 통해서 다윗을 단련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겸손한 왕으로 만들어 갔다.

요 몇일 운전하는 중에 운전 연수하는 자동차 몇대가 계속 내 앞에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추월해서 그들을 내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나의 인내를 연단하심을 알았기에 그들이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천천히 달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지고 해결되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지기 전보다 더 비참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갈등과 고민만 더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그대로 있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해결된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닐까?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건강의 어려움은 쉽게 눈에 띄지만 관계의 어려움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눈에 보이는 재정의 어려움이나 건강의 어려움을 통해 마음이 겸허해 지고 관계가 회복된다면 그것이 축복이다. 하지만 재정이 풀리고 건강이 회복되면서 교만하고 관계가 어그러진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눈에 보이는 집, 자동차, 타이틀, 사역 등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겸손, 사랑, 용서, 은혜 등이 내 안에 자리잡는다면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며 영원한 축복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